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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근의 사진조각 <환상 공간>

투명한 함정의 환영 공간

 

시선은 이미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매끄러운 표면에 미끄러지던 시선은 어느 순간 투명한 함정에 빠져들어 이미지의 심연으로 침잠한다. 하지만 이미지의 투명한 피부로 만들어진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이다. 주책없이 끌려온 시선은 황망함을 느끼며 반대쪽으로 달아나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막다른 하얀 벽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른다. 투명한 입체로 만들어져 겉과 속의 경계가 모호하고, 보는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겹쳐진 이미지가 유동하는 고명근의 사진조각은 이처럼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고 시험에 들게 한다. 투명한 입체를 통해 외부가 안으로 수렴되고, 텅 빈 내부가 바깥으로 확산하는 환영 공간을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은 과연 겉과 속 중 어느 것인가? 투명한 함정에 빠져 바라보는 것은 실체인가, 허상인가.

 

나는 예술의 본질이 예술작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그 의도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즉, 보여지는 것보다는 보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보는 행위 자체가 미술의 ‘요체’(要諦)라는 것이다. 투명성은 시간의 찰나성과 공간의 비어있음을 형상화시킨다. 내부의 공간을 통해 볼 수 있게 하고, 바깥 공간과 겹쳐지는 내부의 공간을 함께 느껴볼 수 있게 함으로써, 보는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공간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작가노트 중에서

 

국내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한 고명근은 사진과 조각을 결합한 작업을 선보이며, 이른바 ‘사진조각’이라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크게 ‘건물’(Building), ‘자연’(Nature), ‘몸’(Body) 세가지 카테고리로 지속해온 그의 사진조각은 미국 유학 중인 80년대 후반에 처음 시작됐다. 당시 뉴욕 브룩클린의 허물어지고 쇠락하는 건물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작가는 이를 카메라로 기록하고, 스스로 만든 나무 구조물에 사진을 접착하여 입체적인 조형물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사진과 조각은 각각 이미지가 평면과 입체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시각예술 중에서 가장 극과 극인 매체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더디게 완성되는 조각과 달리 한 순간에 이미지가 표현되는 사진은 서로 제작방식도 무척 다르다.” 작가의 말처럼 서로 다른 성격과 제작방식을 지닌 두 매체를 결합하려는 시도는 결코 쉽지 않았다. 예술의 역사를 살펴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결합이었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는 믿음으로 사진과 조각을 결합하는 실험은 계속 되었다. 그리고 입체를 평면으로 전환시키는 사진의 환영(Illusion)적인 이미지와 공간 안에서 조각이 확보하는 실체적인 구조를 결합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2000년대 초반부터 투명한 재료들을 작업에 끌어오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투명한 OHP 필름과 플렉시글라스(Plexiglass)를 사용해 사진조각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고 섬세한 수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미지를 선택해 OHP 필름 위에 출력하고, 플렉시글라스에 압착시킨 후에 원하는 구조물의 모양에 맞게 재단한다. 그리고 인두를 사용해 각 모서리를 접합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된다. 이처럼 입체에서 평면으로 전환된 사진 이미지가 다시 평면에서 입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작가 특유의 사진조각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조각의 몸을 지닌 사진이자 동시에 사진의 피부를 지닌 조각인 작품은 관객에게 단순한 신기함을 넘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지각 체험으로 이끈다.

투명한 입체 구조물은 앞면과 뒷면 그리고 옆면이 서로 겹쳐져 보인다. 이러한 중첩의 효과는 시점에 따라 고정된 이미지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구조물의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와 같은 환영 공간에서 관객은 무언가 보려고 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이미지들의 실체는 없고, 동시다발적인 환영처럼 느껴지게 만든다”고 지적하고, 한발 더 나아가 “고명근의 작품은 ‘실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작가의 궁극적인 주제의식을 언급한다.

 

지금 보고 있는 이미지의 표면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사물을 보고 믿어왔던 일련의 인식 과정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미지로 만들어진 집의 ‘텅 비어있음’을 인지하면서 허상에 불과한 이미지의 덧없음을 환기하려는 작가의 본심은 마치 불교철학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지를 다루는 작업을 하면서 세상은 결국 이미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것들이 소멸해가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순간뿐인 이미지, 즉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수많은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은 결국 텅 비어있다.”

몸(Body)과 건물(Building) 그리고 자연(Nature)의 이미지를 채집해 사진조각을 만드는 작업의 기저에는 이러한 세계관이 깔려있다. 그리고 인간 삶의 지지기반인 세 요소에는 각각 ‘인간의 기억, 감정, 의지를 담는 몸’, ‘몸의 확장이며 인간의 표현인 건물’, ‘인간의 시작이며 한계의 끝인 자연’이라는 작가의 사유가 투영된다. 몸이든, 건물이든, 자연이든 아무리 이미지를 채워도 사진조각은 텅 비어 있는 투명한 용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결국 ‘영원히 실체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명제와 맞닿아 있다.

 

사진조각이 빚어낸 환영공간에서 우리 감각의 허망함과 실체 없는 이미지의 허무함을 일깨우는 고명근의 작품세계는 계속 확장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몸, 건물, 자연으로 명확했던 카테고리가 한 작품 안에 혼재되거나,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더욱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람 모습의 작은 조각을 작품 안에 배치해 관객에게 내러티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작을 만날 수 있는 고명근의 개인전 <환상공간, Space Illusion>이 1월19일부터 서울 소격동의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시선을 투명한 함정에 빠져들게 하는 고명근의 사진조각은 2월10일까지 관객을 기다린다.

 

글|박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