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명근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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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영의 공간
고명근은 사진이라는 시간의 기억 혹은 순간의 이미지를 공간이라는 그릇 안에 담아낸다. 입방체 안에 고여있는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흡사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사진과 조각이라는 다른 장르 사이에서 평면과 입체, 닫힘과 열림의 혼재를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사진이 포착한 시간의 토막을 조각이라는 조형적 구조 안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실재하는 3차원의 피사체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2차원의 평면 안에 담기고, 이는 다시 면의 구조물로 이루어진 입체 안에서 공간감을 얻는 것이다.
‘사진 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진 고명근은 1980년대부터 사진과 조각을 결합한 작업을 이어왔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는 미국유학시절에 사진의 즉각적인 매력에 빠졌고, 둘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전에도 작가들이 조각과 사진을 혼합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보다 견고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국내외 미술계로부터 주목 받았다. 특히 사진과 조각의 성향에 국한되지 않고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고유성을 가진다는 점이 혼성을 다루는 비슷한 여타 작업들과의 차별성이라고 생각된다. 장르의 전형성을 뒤집어 보이는 작품은 사진을 조각처럼, 조각을 사진처럼 표현하는 재미있는 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직접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수집한 장면들로 작업의 소스가 되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채집된 사진 중에서 선택한 이미지를 대형 잉크젯 프린터로 OHP필름에 출력한다. 그리고 나서 출력한 필름을 플랙시글라스에 압착해 붙여 패널로 만들고, 원하는 크기로 재단한다. 재단된 플랙시글라스 패널은 입체 구조물이 되어 인두 기법으로 용접된다. 나무 위에 사진 이미지를 덧대어 작업하던 1990년대의 초기 방식과 비교하면, 개선된 현재의 방식은 훨씬 더 안정적이고 견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과정은 진보하는 작업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매체의 발전과 방법론의 변화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외형의 입체감을 사진의 상으로 대체하고, 원형적인 형상을 구조화한 조형적 형태는 장르의 해체를 통하여 각각의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접목시키는 작가의 공력과 독창적인 시각을 증명하고 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환영(illusion)을 시각화하는데 있어 사진이라는 장르는 어떤 면에서는 의외의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번 인화되면 그 근본적인 형태가 바뀌지 않는 사진의 특성상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 보이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성격을 띠는 사진은 내적 경험이나 관념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명근의 작업은 촬영된 사진 한장, 한장이 담고 있는 시선과 현장성을 단순히 이미지의 파편에 그치지 않고, 투영하게 점층시키면서 정지된 순간을 움직이게 한다. 여기에 조각이면서 동시에 사진이라는 점에서 작가가 포착한 단편적 이미지들이 조각이라는 구조물 안에서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다는 장점이 더해진다. 단순한 현실의 기록 혹은 복사가 아닌 그것을 바탕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미지의 반복과 교차를 통해 또 다른 독자적 이미지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작업 재료에 있어서도 조각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인 덩어리감이 없는, 심지어는 투명하기까지 한 OHP필름을 채택한 것은 남다른 사고의 전환이라고 여겨진다. 겹쳐진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는 환영의 시각적 효과는 촉각적인 측면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뚜렷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일반적인 조각의 육중함이 아닌 비어있는 내부를 관통하는 여유로운 공간감은 물리적인 중량감을 넘어서는 정신적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며, 필름의 투영성은 각 면의 이미지가 교차, 대칭, 중첩되면서 가볍게만 느껴질 수 있는 재료의 한계성을 넘어서 미묘한 깊이와 색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고명근의 사진조각은 표현의 주체보다는 개념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조각의 개념을 조망하고, 반대로 정지된 이미지에는 입체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사진의 영상회화적 감각을 발휘하는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환영적 이미지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담겨있다. 순간에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장면은 마치 우리 인생이 지나온 어느 지점 같으며, 그렇게 덧없지만 아름다운 것이 세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텅 빈 환영,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그렇게 가벼운 영혼의 시간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순간으로 지속되고 있다.
아트파크 큐레이터 이진아